《무산일기》(2010)는 거창한 서사도, 화려한 전개도 없는 영화다. 하지만 이 작품은 21세기 대한민국 사회 속 보이지 않는 이들, 특히 탈북자라는 존재가 어떻게 살아가고 소외당하며, 결국 어떤 방식으로 존재를 증명하려 애쓰는지를 절제된 시선으로 담아낸다. 감독 박정범은 직접 각본, 연출, 연기를 맡으며 이야기에 진정성과 체험적 리얼리티를 더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영화 이상의 기록이며, 우리 사회의 감춰진 거울과도 같은 작품이다.
1. 탈북자 청년 ‘승철’, 그의 존재는 어디에 닿을 수 있는가
영화의 주인공 승철(박정범)은 북한에서 탈출해 남한에 정착한 청년이다. 그는 서울 외곽 무산동의 허름한 옥탑방에서 또 다른 탈북자인 정애(강은진), 지나치게 현실적인 탈북자 친구 경철(진용욱)과 함께 지낸다. 그들의 삶은 남한 사회 속에서 ‘적응’이라는 이름 아래 늘 경계에 놓여 있다. 승철은 교회에 다니며 전단지를 붙이는 일, 식당 아르바이트, 공장 일 등 생계를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지만, 그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그는 남한 사회에서 기록상 존재는 되지만, 사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계인’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빛, 고용주의 말투, 친구의 냉소 속에서 승철은 끊임없이 외면당하고, 묵묵히 살아낸다. 감독은 승철의 삶을 어떠한 감정적 장치도 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연민’이 아닌 ‘이해’를 유도하고, ‘타인’이 아닌 ‘우리’의 문제로 다가오게 만든다.
2. 리얼리즘의 정수, 말보다 침묵이 많은 영화
《무산일기》는 대사가 적고, 음악도 거의 없다. 카메라는 인물을 따라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인물이 처한 사회적 배경과 공간을 고스란히 포착한다. 영화는 종종 정적이 길게 흐르는 장면을 활용한다. 예를 들어 승철이 지하철에서 전단지를 돌리고 그 누구도 눈도 마주치지 않을 때, 관객은 그 침묵 속에서 더욱 깊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박정범 감독은 이 영화에서 상업적 요소를 철저히 배제하고, 도큐멘터리 같은 시선으로 극영화를 만든다. 이는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또한, 박정범 본인이 승철 역을 맡았다는 점은 인물에 대한 감정의 깊이를 더욱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게 만든다. 그의 얼굴에는 과장도 없고, 연기하려는 의도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이 고요하게 살아내는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3. 종교, 동료, 연민… 무너지지 않는 인간의 흔적들
승철은 탈북자이지만, 그 전에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다. 그는 교회에서 만난 자원봉사자 자매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관계를 통해 조금이나마 자신이 ‘누군가’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남한 사회에서 그가 마주하는 건 무관심, 경계심, 심지어 연민조차 계산된 위선이다. 탈북자 친구 경철은 현실에 순응하며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속엔 끊임없는 불안과 체념이 함께 한다. 《무산일기》는 그러한 인간 군상들을 통해 단순히 탈북자의 문제를 넘어서, 현대 사회에서 주변화된 존재들의 삶을 보여준다.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지만,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철은 끝내 스스로를 지우지 않는다. 영화 마지막, 승철이 다시 전단지를 들고 거리를 걸어가는 장면은 어떤 희망도 말하지 않지만, 그의 존재가 아직 이곳에 남아 있다는 것을 조용히 외친다. 그 한 장면이 모든 대사를 대신한다.
《무산일기》는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가장 낮은 곳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상업적 화법 없이, 감정적 강요 없이, 한 사람의 하루를 따라가며 묻는다. "당신은 이들을 정말 본 적 있는가?" 지금 다시 이 영화를 본다면,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조용한 다짐이야말로, 이 영화가 남긴 가장 강한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