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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지금 다시 보는 박하사탕 (설경구, 문소리)

by lifetreecore 2025.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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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남긴 명작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설경구의 인생 연기, 문소리의 담백한 존재감,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서사 구조는 이 작품을 단순한 멜로드라마를 넘어선 한국 현대사의 심리적 아카이브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다시 보는 《박하사탕》은 단순히 ‘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사회와 개인의 상처를 되돌아보게 하는 조용한 절규입니다.

1. 설경구의 인생연기: 인간의 붕괴를 거꾸로 훑다

《박하사탕》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한 이야기 구조입니다. 영화는 주인공 ‘영호’(설경구)가 철길 위에서 "나 돌아갈래!"라고 외치며 죽음을 택하는 장면에서 시작하고, 이후 그의 삶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하나의 인물이 점차 어떻게 파괴되어 갔는지, 그리고 그 이면에 어떤 상처와 시대가 있었는지를 목격하게 됩니다. 설경구는 이 영화에서 인간 감정의 극단을 보여줍니다. 처음엔 타인에게 폭력을 일삼는 차가운 인물로 등장하지만, 시간이 거슬러 갈수록 고통받고, 상처 입고, 결국엔 순수했던 청년으로 되돌아갑니다. 이 극적인 감정의 반전과 내면의 진폭을 설경구는 어떤 과장 없이 완벽히 구현해냅니다. 특히 마지막에 해당하는 첫사랑 ‘순임’과의 강가 장면에서 그는 말없이 감정을 폭발시키며, "진짜 박하사탕처럼 씁쓸하고 달콤한 감정"을 상징적으로 전합니다. 설경구의 연기는 이 영화가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2. 구조적 실험과 진정성: 거꾸로 흐르는 시간, 직진하는 감정

《박하사탕》은 총 7개의 시간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99년부터 1979년까지 거꾸로 전개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은 이 구조를 통해 단지 한 남자의 삶이 망가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과 시대가 한 인간을 어떻게 파괴했는가를 조명합니다. 각 시간은 ‘비극 → 원인 → 더 과거’로 구성되며, 매 장면마다 인물의 감정이 더 투명하게 드러나고, 그가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듭니다. 폭력, 권력, 사랑의 상실, 그리고 순수했던 한 청년의 몰락—이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이기보다 시대와 구조의 폭력성이 만든 결과임을 영화는 조용하지만 확고하게 전달합니다. 감독은 이 실험적인 구성에도 불구하고 감정의 선명도를 잃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보기’는 관객이 감정을 더 깊이 체험하게 만드는 장치가 됩니다. 마지막이 처음이 되고, 처음이 마지막이 될 때, 관객은 "누구나 이럴 수 있었고, 이럴 수도 있었다"는 데 공감하게 됩니다.

3. 순임과 순수함의 상징: 박하사탕이 의미하는 것

영화의 제목인 ‘박하사탕’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적 상징입니다. ‘순임’(문소리)이 건네주는 박하사탕은 ‘영호’가 세상과, 그리고 자기 자신과 가장 순수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시절을 상징합니다. 영화가 거꾸로 진행되며 박하사탕은 점차 현재에서 사라지고, 과거에서 되살아나며, 결국 관객은 "무엇을 잃었는가?"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문소리는 이 영화에서 큰 대사나 극적인 연기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용하고, 일관된 미소와 시선으로 '기억 속의 따뜻함'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능합니다. 그녀는 영호가 잃어버린 것, 돌이킬 수 없는 것, 돌아갈 수 없는 과거 그 자체입니다. 박하사탕은 어쩌면 모든 사람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한 시절의 감정'일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첫사랑일 수 있고, 누군가는 가족, 또는 잃어버린 꿈일 수 있습니다. 《박하사탕》은 그런 감정을 스크린 위에 시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박하사탕》은 단순한 비극이나 멜로드라마가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이 어떻게 사회에 의해, 혹은 선택 아닌 선택에 의해 파괴될 수 있는지를 그린 시대의 슬픈 초상화입니다. 설경구의 인생 연기, 이창동 감독의 대담한 서사, 박하사탕이라는 시적인 상징이 어우러져 지금 다시 볼수록 더 깊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자신의 기억, 감정, 과거에 대해 되돌아보고 싶다면, 오늘 《박하사탕》을 다시 감상해보시길 진심으로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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