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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보는 베테랑 (황정민, 유아인, 류승완 연출)

by lifetreecore 2025.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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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개봉작 〈베테랑〉은 생활밀착형 형사물의 통쾌함과 한국 사회의 ‘갑질’을 향한 날 선 풍자를 결합한 범죄오락액션입니다. 황정민과 유아인의 맞대결, 류승완 감독의 리드미컬한 액션 연출은 지금 다시 봐도 속도감과 완성도로 빛납니다.

황정민: 생활밀착형 형사의 설득력

〈베테랑〉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형사 ‘서도철’은 전형적 영웅이 아니라, 길바닥 냄새가 묻은 ‘생활형’ 캐릭터입니다. 그는 사건을 전개시키는 힘을 ‘멋짐’이 아니라 ‘리얼함’에서 끌어옵니다. 조사실의 눈빛, 범인을 몰아붙일 때의 타이밍, 동료들과의 장난 섞인 호흡까지 모두 실제 형사팀의 질감을 살려냅니다. 초반부 소액사건 처리에서 보여주는 ‘현장 감각’은 관객에게 이 인물이 왜 믿음직스러운지 단번에 이해시키고, 중반 이후 재벌 3세 사건을 파헤칠 때는 법과 편법, 공권력의 경계 위에서 유연하게 움직입니다. 그가 현장에서 취하는 방법은 늘 합리적이지만 교과서적이지만은 않습니다. 때론 발품과 눈치, 때론 사람 냄새로 일의 실마리를 잡습니다. 이 ‘생활감’이 바로 〈베테랑〉의 현실성과 쾌감을 동시에 보장합니다. 서도철은 독불장군이 아닙니다. 팀원들과의 ‘합’이 핵심입니다. 넉살 좋은 농담으로 긴장을 풀어 주면서도, 범죄의 본질을 겨누는 순간에는 단호하게 결정을 내립니다. 이런 리듬은 황정민의 물 흐르듯한 대사 처리와 순간적인 표정 변화에서 완성되는데, 특히 피해자를 만날 때의 낮은 톤과 가해자를 마주할 때의 날 선 톤을 섬세하게 구분하며 인물의 윤리를 분명히 합니다. 후반부 결전을 앞두고도 그는 ‘영웅의 거창한 선언’ 대신, 일상의 언어로 정의를 말합니다. 그 담백함이 오히려 강력한 설득력을 낳지요. 지금 다시 보면, 서도철은 시대가 요구한 ‘현실적 정의감’의 얼굴입니다. 선악을 흑백으로 가르지 않고도, 상식의 선을 분명히 긋는 태도. 관객이 그에게 환호하는 이유는 통쾌한 주먹질 때문만이 아니라, 그 주먹이 언제, 왜,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아인: 조태오의 악랄함과 세대 풍자

유아인이 연기한 ‘조태오’는 한국영화 악역의 계보에서 유독 선명하게 기억되는 캐릭터입니다. 유명한 대사 “어이가 없네”처럼 겉으로는 가볍고 장난스러워 보이지만, 실상은 권력을 장난감처럼 휘두르는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의 악행은 과시적인 폭력보다 ‘무심한 잔혹함’에서 비롯됩니다. 사과를 요구받아도 고개를 숙일 줄 모르는 태도, 돈과 인맥으로 사건을 ‘관리’하려는 태도, 인간을 숫자로 치환하는 냉담함이 조태오의 본질을 이룹니다. 유아인은 미세한 표정과 속도 조절로 캐릭터의 두 얼굴을 드러냅니다. 회장 앞에서는 얌전한 미소, 약자 앞에서는 짜증 섞인 권태, 위기에 몰리면 발작적으로 튀어나오는 분노. 이 감정의 파형은 장면마다 톤을 바꾸며, 관객에게 본능적인 불쾌감과 긴장을 안깁니다. 조태오를 둘러싼 비서·임원 라인의 움직임은 악의 구조를 시각화합니다. 누군가는 문장을 다듬고, 누군가는 CCTV 각도를 바꾸며, 누군가는 합의금을 계산합니다. 이 시스템의 꼭대기에 앉아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철없는 권력자가 바로 조태오입니다. 그래서 이 악역은 개인의 일탈을 넘어 세대 풍자와 사회 비판의 매개가 됩니다. 젊음은 민첩함이 아니라 무책임으로, 재력은 책임이 아니라 면죄부로 작동할 때 무엇이 벌어지는지, 영화는 조태오를 통해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유아인의 연기는 과장이 아닌 정확함으로 설득합니다. 카메라가 가까워졌을 때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 몸의 각도와 발걸음 속도, 문장 끝을 ‘툭’ 끊는 어조는 캐릭터를 살아 있게 만듭니다. 최종 대치에서 무너지는 순간조차 ‘불복’의 태도를 유지하는 조태오의 모습은, 패배 속에서도 구조를 믿는 특권의 윤리를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지금 다시 보면, 이 악역은 한 시대의 자화상처럼 서늘합니다.

류승완 연출: 액션과 풍자의 정확한 호흡

류승완 감독은 〈베테랑〉에서 ‘리듬’으로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추격과 난투, 잠입과 증거수집 같은 동작을 풍자와 코미디의 비트로 엮어, 장면마다 호흡을 다르게 설계합니다. 초반부에는 속도와 웃음을 섞어 관객의 방어막을 내리고, 중반에는 수사 퍼즐의 긴장을 촘촘히 쌓아 올리며, 후반에는 장거리 추격과 로케이션 액션으로 카타르시스를 폭발시킵니다. 카메라는 흔들리되 산만하지 않고, 편집은 빠르되 정보가 유실되지 않습니다. 특히 도심 차량 추격, 창고·주차장 난투, 로비·엘리베이터 시퀀스 등은 스턴트의 물성, 충돌음과 호흡음의 층위를 치밀하게 쌓아 ‘맞는 느낌, 달리는 느낌’을 실감나게 전달합니다. 액션은 오락이지만, 목적은 풍자입니다. 경찰 조직의 현실, 자본 권력의 위계, 언론과 여론의 온도까지 장르적 장면 사이로 스며들게 만드는 솜씨가 뛰어납니다. 대사 한 줄, 표정 하나로 ‘갑질’의 문법을 들춰내는 동시에, 관객에게 너무 무겁지 않게 삼키도록 리듬을 조절합니다. 색과 소품, 의상도 기능합니다. 조태오의 깔끔한 슈트와 밝은 톤의 인테리어는 무책임한 권력의 가벼움을 시각화하고, 형사팀의 어두운 톤과 좁은 공간은 ‘현장’의 밀도를 강조합니다. 음악은 과잉을 피하고, 사운드는 현장감에 기댑니다. 그 결과 〈베테랑〉은 메시지 영화라기보다 ‘메시지를 가진 오락영화’로 자리 잡습니다. 재관람의 즐거움도 분명합니다. 첫 관람 때는 통쾌함이, 다시 보면 구조와 리듬의 정교함이 눈에 들어옵니다. 특정 장면의 카메라 위치, 컷의 길이, 동선의 정확도가 왜 관객의 심박을 끌어올리는지 체감하게 되죠. 그리고 엔딩의 ‘거리’는 영화가 청량한 박수로 끝나지 않도록, 현실과의 접점을 마지막까지 붙잡아둡니다. 그래서 〈베테랑〉은 시간이 흘러도 촌스럽지 않은 현재형 오락영화로 남습니다.

〈베테랑〉은 생활형 형사의 리얼함, 악역의 날 선 초상, 액션과 풍자의 호흡이 정확히 맞아떨어진 모범적 상업영화입니다. 다시 보면 웃음뒤 구조가 보이고, 쾌감 뒤 질문이 남습니다. 주말에 재관람하며 ‘왜 통쾌했는가’를 장면 단위로 천천히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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