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삶의 끝자락에 선 한 여성이 시를 배우며 세상의 아름다움과 잔혹함을 동시에 마주하는 과정을 담은 깊은 성찰의 영화입니다. 윤정희가 연기한 미자는 평범한 중년 여성이지만, 그의 시선은 관객에게 인간성과 예술, 죄책감과 용서라는 묵직한 주제를 전달합니다. 본 글에서는 이 영화가 전하는 철학적 메시지와 배우 윤정희의 상징적인 연기, 그리고 이창동 감독의 연출적 깊이를 되짚어봅니다.
윤정희의 마지막 연기, 미자의 시선과 침묵
영화 〈시〉에서 윤정희가 연기한 미자는 가난한 중년 여성으로, 손자를 홀로 키우며 조용히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고, 동시에 손자가 끔찍한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녀의 일상은 무너집니다. 이때 미자는 동네 문화센터에서 시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일상 속 아름다움과 삶의 진실을 받아들이려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윤정희의 연기는 격정적이기보다는 침묵과 시선, 섬세한 표정 변화로 모든 감정을 표현합니다. 그녀의 미자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관객은 그녀의 눈빛만으로도 슬픔, 혼란, 분노, 절망,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희망까지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영화 후반부, 사건의 진실과 손자의 죄를 알면서도 누구에게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미자의 내면 갈등은 윤정희의 정제된 연기로 오히려 더 강렬하게 전달됩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시를 읊는 장면은 관객의 가슴을 울리는 영화의 하이라이트이며, 이 연기를 마지막으로 윤정희는 배우로서 아름답게 퇴장했습니다.
시(詩)를 통한 현실과 구원의 이중성
〈시〉는 제목 그대로 '시'라는 예술 장르를 통해 현실의 잔혹함과 인간 내면의 고통, 그리고 예술이 주는 위안과 구원을 동시에 조명합니다. 영화 속에서 미자는 “시를 쓰고 싶다”는 이유로 문화센터에 등록하고, 주변의 사소한 것들에서 영감을 얻으려 애씁니다.
그러나 그녀가 직면하는 현실은 시적이지 않습니다. 손자가 저지른 범죄, 피해자의 죽음, 가해자 부모들의 침묵과 타협, 그리고 사회의 무관심은 시라는 순수한 세계와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룹니다. 그럼에도 미자는 시를 통해 현실과 마주하며, 오히려 그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과 책임을 찾으려 합니다.
영화는 시가 단지 미화된 언어가 아니라, ‘진실을 직면하고 삶을 기록하는 수단’이라는 철학을 관통합니다. 미자는 마지막에 피해 소녀를 위한 시를 씁니다. 그것은 회피나 변명이 아닌, 대신 울어주는 시, 대신 말해주는 시였습니다. 지금 다시 보면, 영화가 시를 단순한 문화적 도구가 아닌, 가장 인간적인 목소리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더욱 깊은 감동을 줍니다.
이창동 감독의 철학적 연출과 질문
이창동 감독은 사회적 현실을 시적 언어와 영상으로 표현하는 감독입니다. 〈시〉는 그의 연출 세계 중에서도 가장 조용하고, 동시에 가장 날카로운 작품입니다. 그는 사건의 직접적 묘사나 폭력을 보여주지 않고, 관객 스스로 상상하게 만들며 감정의 밀도를 높입니다.
이창동 감독은 영화 속에서 ‘무언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가해자 아이의 죄를 알고도 침묵하는 어른들, 피해자의 존재조차 지워버리려는 사회, 그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 속에서, 미자만이 조용히 '책임'을 끌어안습니다. 영화는 이런 구조를 통해 관객에게 직접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카메라는 화려하지 않지만, 인물과 공간을 철저히 현실적으로 그려냅니다. 텅 빈 골목, 작은 강, 낡은 아파트, 버스 안의 침묵 등은 모두 시의 소재이자 현실의 상징입니다. 특히 마지막 시 낭송 장면은 이창동 감독의 미학이 집약된 명장면으로, 죽음과 구원, 책임과 용서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을 관객에게 남깁니다.
지금 다시 이 영화를 보면, 그가 던지는 질문이 단순히 특정 인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시를 잊고 사는 우리 모두’를 향한 것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는 윤정희의 명연기, 이창동 감독의 철학적 연출, 그리고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 어우러진 깊이 있는 작품입니다. 지금 다시 보면, 영화는 단순히 시를 배우는 여정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책임지고 말해야 할 진실에 대한 기록임을 깨닫게 됩니다. 조용한 영화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 강하게 울리는 메아리 같은 작품. 꼭 다시 감상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