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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보는 1987 (김윤석, 하정우, 장준환)

by lifetreecore 2025.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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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개봉작 〈1987〉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기점으로 번진 6월 민주항쟁의 과정을 다양한 시민의 시선에서 엮은 작품입니다. 김윤석과 하정우의 강렬한 연기, 장준환 감독의 밀도 높은 연출이 결합해 역사적 사실을 감동적인 드라마로 재현합니다.

김윤석: 권력의 민낯을 체현한 ‘박처장’의 응시

〈1987〉에서 김윤석은 정보기관의 핵심 실세 ‘박처장’으로 분해 냉혹하고 계산적인 권력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사건 초기부터 사망 원인을 축소·은폐하려는 라인을 지휘하며, 체계화된 폭력과 관료적 책임 회피가 어떻게 맞물려 작동하는지 드러냅니다. 김윤석의 연기는 과장된 악행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서류와 지시, 짧은 문장, 무심한 표정 같은 디테일에서 권력의 폭주를 체감하게 만듭니다. 이 인물은 분노의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구조적 악의 설계도를 보여주는 존재입니다. 특히 그는 ‘사실을 관리하는 기술’을 통해 사회를 통제하려 듭니다. 언론을 압박하고, 수사 라인을 분절시키며, 책임을 하부로 전가하는 장면들은 1987년이라는 특정한 시간을 넘어 권력이 진실을 다루는 방식을 상징합니다. 김윤석은 목소리 톤의 미세한 변화, 시선 처리, 정지된 표정만으로도 장면의 온도를 바꿉니다. 그의 냉정함은 단순한 악역의 카리스마를 넘어, ‘시스템화된 폭력’이라는 더 큰 주제를 관객 앞에 놓습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드러나는 짧은 침묵은 말보다 많은 것을 말합니다. 그는 늘 한 발 앞서 증거를 삭제하고, 책임의 경계를 흐립니다. 이때 관객은 ‘나쁜 개인’보다 ‘악을 가능케 한 구조’에 시선을 옮기게 되며, 영화는 이를 통해 분노를 정치적 자각으로 확장합니다. 지금 다시 보면 김윤석의 연기는 시대의 공기를 압축한 기록처럼 보이며, 권력 비판의 정조를 정확히 정렬시키는 축으로 기능합니다.

하정우: 제도 안에서 싸우는 ‘최검사’의 윤리와 결기

하정우가 연기한 검사는 제도 내부에서 진실을 지키려는 인물입니다. 그는 상명하복의 압력, 조직의 관성, 실무적 난점 속에서 사건의 기록을 외부로 흘려보내고, 적법 절차를 무기 삼아 권력의 벽을 조금씩 밀어냅니다. 하정우의 연기는 대결의 고조보다 ‘일의 지속’을 선택합니다. 큰 제스처 대신 서류 결재의 한 줄, 증거 보존의 체크, 언론에 던지는 단서 같은 세밀한 행동들이 이야기의 마디를 이룹니다. 그는 두려움이 없는 영웅이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도 멈추지 않는 공무원의 얼굴을 보여줍니다. ‘법’과 ‘절차’는 영화 속에서 느린 무기이지만, 한 번 굴러가기 시작하면 권력의 조작을 무너뜨리는 괴력을 발휘합니다. 하정우는 건조한 리듬 안에 분노와 연민을 숨겨놓고, 순간순간 결정적인 선택으로 터뜨립니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거창한 이념이 아닌 실천의 총합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하정우의 말맛은 현실적입니다. 회의실의 짧은 문장, 복도에서의 낮은 목소리, 상대의 허점을 정확히 찌르는 타이밍이 캐릭터의 윤리를 또렷하게 각인시킵니다. 그는 조직의 일부이면서도 조직 너머의 시민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이 인물의 승리는 구호의 승리가 아니라, 기록과 증거, 연대와 절차의 승리로 받아들여집니다. 지금 다시 볼수록 그의 연기는 ‘제도 안의 저항’이 얼마나 실무적이고 끈기의 문제인지를 세밀하게 증명합니다.

장준환의 연출: 다수의 얼굴로 엮은 민주주의의 서사

장준환 감독은 〈1987〉에서 단일 주인공 서사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검찰, 형사, 교도관, 기자, 대학생, 시민 등 다양한 인물의 시선을 교차 편집으로 엮어 ‘사건’이 ‘운동’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방식은 영웅 신화를 배제하고, 다수의 작은 용기가 사회를 움직인다는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구축합니다. 화면은 과열되지 않고, 현장음과 군중의 호흡, 관리 문서의 차가운 질감이 교차하며 리듬을 만듭니다. 미장센 또한 서사의 윤리를 지지합니다. 밀실과 복도, 취조실의 낮은 조도는 은폐의 공간을, 법정 문서와 신문 활자의 클로즈업은 기록의 힘을 상징합니다. 클라이맥스에서 확장되는 거리의 롱숏은 개인의 용기가 집합적 에너지로 변환되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음악 사용은 절제되어 있고, 대신 소리의 층위를 풍부하게 쌓아 역사적 긴장감을 현재형으로 되살립니다. 무엇보다 장준환은 사실의 정확성과 드라마의 밀도를 균형 있게 유지합니다. 실재 인물과 사건에서 출발하되, 캐릭터의 내적 동기를 치밀하게 설계해 관객이 감정적으로도 이동하게 만듭니다. 폭력의 묘사는 자극 대신 구조적 이해로, 영웅화는 선동 대신 연대로 치환됩니다. 그래서 〈1987〉은 재현 영화의 한계를 넘어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과정의 영화가 됩니다. 지금 다시 보면, 이 영화는 과거를 아카이브하는 작품을 넘어 현재의 시민에게 질문을 갱신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거리로 나가게 했는가, 기록하고 말하는 일은 왜 계속되어야 하는가. 장준환의 연출은 답을 단정하지 않고, 관객의 마음을 행동의 자리로 천천히 이끕니다.

〈1987〉은 거대한 영웅담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내민 작은 용기가 모여 역사를 바꿨음을 증명한 영화입니다. 김윤석의 냉혹한 권력, 하정우의 실무적 정의, 장준환의 절제된 연출은 지금 봐도 유효합니다. 다시 한 번 영화를 통해 ‘말하고 기록하는 용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어가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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