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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지금 다시 보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김태우, 고현정)

by lifetreecore 2025.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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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2009년 작품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삶과 인간관계를 통찰하는 특유의 아이러니와 유머로, 처음 볼 때보다 두세 번 볼수록 더욱 진가가 드러나는 영화입니다. 김태우와 고현정이 현실과 허위, 자의식과 허영 사이를 오가는 인물로 등장하며, 관객은 ‘자신을 잘 안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민낯을 슬며시 비추는 현실풍 풍자극입니다.

1. 김태우의 자의식 과잉 캐릭터: 진짜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

김태우는 이 영화에서 영화감독 ‘구경남’ 역을 맡습니다. 그는 지방 영화제에서 강연을 하며, 자신을 예술가이자 지성인으로 여기지만, 실제 그의 행동은 모순과 허세로 가득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점잖고 현학적인 태도를 유지하지만, 술만 마시면 선을 넘고, 여성 앞에서는 쉽게 마음을 흔들리며 실수도 잦습니다. 홍상수 감독은 이 인물을 통해 남성 중심 문화에서 자란 ‘지적 허세형 남성’의 전형을 풍자합니다. 김태우는 그 역할을 능청스럽게 소화하며, 동시에 우스꽝스럽고 안쓰러운 인물로 완성해냅니다. ‘구경남’은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지만, 사실 진정성도 깊이도 없는 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영화를 보며 관객은 "나도 저런 말 많이 하지 않았나?" "나도 저런 태도를 취했었나?" 라고 되묻게 됩니다. 이 캐릭터는 한 개인의 실패담이 아니라,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 혹은 예술가의 자화상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2. 고현정의 도발과 거리감: 감정의중심에 선 여성

고현정이 연기한 ‘고선영’은 구경남과 술자리를 함께하고, 가까워지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다가가다가도 금세 선을 긋고, 따뜻하다가도 차갑게 돌아섭니다. 이 복잡한 감정선을 고현정은 무척 섬세하게 표현하며, 영화의 감정적 긴장을 이끌어갑니다. 선영은 단순한 여성 캐릭터가 아닙니다. 그녀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판단하고 다가오는 남성에게 언제든 스스로의 감정과 선을 지키며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역시 어떤 감정적 공허함과 혼란 속에 있다는 암시를 담고 있어, 단선적으로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고현정은 이 인물을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듯한 시크함과, 내면 깊은 곳의 흔들림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그 결과, 선영은 관객에게 한 인물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유보하게 만드는 입체적인 여성상으로 다가옵니다.

 

3. 홍상수식 영화의 정수: 반복, 술자리, 그리고 부끄러움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전형적인 ‘홍상수 영화’의 구조를 따릅니다. 장면은 반복되고, 술자리가 중심에 있으며, 인물은 솔직한 듯하지만 실은 가장 중요한 말을 숨깁니다. 감독은 이 구조를 통해 인간의 모순과 허영, 사회적 가면의 이면을 들여다봅니다. 영화는 크게 두 파트로 나뉘며, 마치 유사한 일이 반복되는 듯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구경남이 말과 행동이 다르듯, 영화의 이야기 구조 역시 ‘반복을 통해 진실을 숨기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홍상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인간은 자신을 잘 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이는 제목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특히, 누군가의 삶이나 감정, 의도를 단정지으려는 태도가 얼마나 무례한지를 조용히 비판합니다. 이 영화는 큰 사건 없이 잔잔히 흘러가지만, 그 안에 담긴 인간 본성의 날카로운 통찰은 깊이 남습니다. 보는 이의 삶과 감정이 어느 지점에서라도 포개진다면, 그것만으로 이 영화는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인간의 허세와 관계의 모호함을 유머와 일상 대화를 통해 해부한 작품입니다. 김태우와 고현정의 절묘한 연기, 홍상수 감독의 미니멀한 연출은 ‘무엇을 말하지 않느냐’로 더 많은 것을 전달합니다. 관계 속의 오해, 자기 합리화, 단정적인 판단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면,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 모두, 누군가에 대해—or 나 자신에 대해—잘 알지도 못하면서 판단하고 있진 않은지 되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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